* 이 책은 책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도서정보]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시가 산책이 될 때, 산책이 시가 될 때…
시를 읽는다는 건 무엇일까? 그럼, 산책을 한다는 건? 그건 어쩌면 고요한 하강과, 존재의 밑바닥에 고이는 그늘을 외면하지 않는 묵묵함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그건 결국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고, 여기에 내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 초록색 신호일 수도 있다.
‘말들의 흐름’ 시리즈의 네 번째 책『시와 산책』은 작가 한정원이 시를 읽고, 산책을 하고, 과연 산다는 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온 시간들을 담아낸 맑고 단정한 산문집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작가의 첫 책이다. 놀라운 이유는 이 책이 너무나 좋아서.
작가가 쓴 스물일곱 개의 짧은 산문에는 그녀가 거쳐온 삶의 표정들이, ‘시’와 ‘산책’을 통해 느꼈던 생활의 빗금들이 캄캄한 침묵 속에서도 의연히 걸어가는 말줄임표처럼 놓여 있다. 한없이 느리게도 보이고, 더없이 끈질기게도 보이고, 지극히 무연하게도 보이는 문장들로 그녀는 ‘시’와 ‘산책’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을 완성한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우리는 그녀가 평생 시를 쓰고, 읽고, 보듬고, 도닥이면서도 결국 혼자 꽁꽁 얼려두고 숨겨만 두었던 마음속의 아주 깊은 곳으로 첨벙 뛰어들어, 그녀의 조용한 방관 아래에서 페소아와, 월러스 스티븐즈와, 로베르트 발저와, 파울 첼란과, 세사르 바예호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울라브 하우게와, 에밀리 디킨슨과, 안나 마흐마토바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포루그 파로흐자드와, 실비아 플라스와, 가네코 미스즈를 만나고야 만다. 그녀와 함께, 그녀가 사랑했던 시인들과 함께, 그녀가 종종 입 밖으로 소리 내던 시어들과 함께, 천천히 너르게 산책을 떠난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겨울의 마음이 되었다가, 봄의 소리가 되었다가, 여름의 발자국이 되었다가, 가을의 고양이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시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산책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쓰다듬으며 서로에게 묻기도 한다.
[작가 정보]
한정원 : 태어나 성장하고 일하며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 구석의 무명인들에게 관심이 많다. 수도자로 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나이 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고 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다.
- 기타 대표작 :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 / 헨리는 피치버그까지 걸어가요.
[책 구절 기록하기]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 옥타비오 파스, '시'
(산책이 시가 될 때) 23p
인디언 소녀가 친구에게 자신의 집으로 오는 길을 설명한다.
'울타리를 지나서 바다 반대편 고사목 쪽으로 와. 일렁이는 가는 물줄기가 보이면 푸른 나무에 둘러싸일 때까지 상류로 올라와. 해가 지는 쪽으로 물길을 따라오면 평평하고 탁 트인 땅이 나오는데, 거기가 나의 집이야.'
요즘에는 거리명과 번지수로 길을 찾아간다. 그것조차도 사람은 기계에 주소를 입력하는 수고만 하고 그다음부터는 기계만 주시하며 목적지까지 가는 식이다. 기계 속 지도는 화석처럼 굳어버린 공간을 보여줄 뿐, 내 곁에 도도히 살아있는 시간을 담지는 못한다. 나무의 푸른색, 강의 소용돌이, 바람의 진동, 짐승의 맥박은 거기 없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소거해버렸다.
그러니 길을 일러주는 인디언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내게는 생경하고도 사랑스러운 시처럼 들린다. 울타리, 바다, 고사목, 상류, 평평한 땅이라는 시어와 그 사이의 징검돌들을 밟아 길을 찾아가는 이는, 친구의 집에 닿았을 즈음이면 시 한 편을 읽은 셈이다.
내가 당신이라는 목적지만을 찍어 단숨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소한 고단함과 아름다움을 거쳐 그것들의 총합이 당신을 만나게 하는 것. 그 내력을 가져보고 싶게 한다.
(행복을 믿으세요?) 29p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사랑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모르면 불행이 닥치는 순간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기록이지만, 나는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 둘은 처음에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행복은 선에 속할 것이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 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과일이 둥근 것은) 51p
나와 아저씨들은 끝까지 서로의 신상에 관해서는 몰랐지만, 아랑곳 않고 곁을 내주었다. 집 앞 담벼락과 트럭 밑처럼, 거기 둥근 밥그릇처럼, 질박한 공간을 당당히 차지하도록 허락했다.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씨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지금도 종종 아저씨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과일 아저씨는 어느 동네에 트럭을 세워둘까, 다리는 괜찮아졌을까, 담배 아저씨는 여전히 애연가일까, 의지할 짝지는 생겼을까. 아저씨들도 역시 나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러니 성별도 세대도 달랐지만, 소극적으로 사귀었고 말없이 헤어졌지만, 나는 이것이 우정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잘 걷고 잘 넘어져요) 89p
"한번 다친 발이니까 더 조심스럽고, 또 아플 것 같고 그렇죠? 그래도 왼발에 힘을 실어야 해요. 안 그러면 계속 약해질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고 발을 내디뎌요. 괜찮아요. 걸어요. 자꾸 걸어요."
그가 커튼을 닫고 나간 후 다시 혼자 남아 누워 있으면서, 나는 어쩐지 후련하고도 글썽글썽한 기분이 되었다. 발목을 고쳐달라 했더니 마음을 고쳐주고 그래요.
긴 회복기였지만 조바심 내지 않고 보냈다. 마음에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만큼, 내 발목이 조금 더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101p
그녀는 이십 대 후반부터 외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즈음의 나에게도 은둔에 대한 욕구가 꾸준히 있었다. 사람이나 생활에 환멸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 만약 내가 진심으로 바라던 대로 살았다면, 에밀리 디킨슨의 일생과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매일 시를 쓰고, 정원을 가꾸고, 생강빵을 잘 구웠던 에밀리, 집 앞에 찾아온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 주고 싶어 창밖으로 바구니를 내려보냈던 에밀리. 고독도 고통도 진실해서 좋다고 말한 에밀리. 자신으로 살기 위해 누구처럼 살기는 거부했던 에밀리.
나는 시인으로 불리기 전, 혼자 튀어서 외로운 캥거루 같았던 그녀의 무명시절을 퍽 사랑한다.
[감상평]
'시'라고 하면 어렵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감성이 부족한 나로서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감정선을 따라서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시' 뿐 아니라 작가가 산책하면서 느끼는 감정과 그동안 겪어 온 에피소드들이 잘 엮여있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작가의 시와 에피소드들은 나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고 어릴 적 추억도 떠오르게 했다. 날씨가 좋은 날, 독서를 좋아하는 분은 공원이나 자연 속에서 이 책을 읽으며 감성 충만한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
[생각 나누기]
ㅇ 이 책은 시 구절과 작가가 산책하면서 느끼는 감정, 경험한 에피소드들이 소개됩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구절이나 에피소드는 무엇인가요?☞ 저는 에피소드가 시작되기 전, 옥타비오 파스 '시'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요즘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중에 어떤 게 좋은지 판단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말함으로써 무슨 일이 벌어 날지도 무섭고, 침묵하기에는 답답하고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아요.
ㅇ 내가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여러분은 어떤 걸 선택하시나요?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면 침묵하는 것이 내가 꿈꾸는 것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 저는 에피소드가 시작되기 전, 옥타비오 파스 '시'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요즘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중에 어떤 게 좋은지 판단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말함으로써 무슨 일이 벌어 날지도 무섭고, 침묵하기에는 답답하고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아요.
ㅇ 여러분 동네를 인디언 소녀처럼 묘사해볼까요?
☞ 지하철 역에서 출구로 나오면 왼쪽에는 대형 백화점이 있어. 우선 백화점을 따라 왼쪽으로 쭉 걸어오면 횡단보도와 대각선 방향으로 작은 공원을 만나볼 수 있어. 길을 건너서 작은 공원 입구로 와. 그리고 공원 안쪽으로 나무 사잇길로 걸어 들어와. 작은 공원이지만 집으로 오기까지 하늘과 주변 여유를 느껴보길 바래. 공원 안에는 갤러리가 하나 있고 갤러리 맞은편이 우리 집이야 :)
ㅇ 작가는 '행복'은 저마다 손금처럼 모두가 달라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행복'은 어떤 의미인가요?
☞ 이 질문이 가장 어렵다. 경제적 자유와 부를 축적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자 행복일까? 아니면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아니면 회사에서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는 것? 아니면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현재를 즐기는 삶이 행복한 것일까? 나의 최종 꿈과 행복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ㅇ 작가는 과일 파는 트럭 아저씨, 동네 아저씨와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여러분도 어릴 적 성별과 세대도 다르고, 신상도 모르지만 우정이라고 생각되는 관계가 있으신가요?
☞ 초등학생 시절 분식점/문방구/만화책방 사장님이 떠오르네요. 그분들에게는 저는 한 명의 손님이었겠지만 저는 어릴 적 자주 찾아가는 가게였기 때문에 내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
ㅇ 작가는 발목이 다쳐서 찾아간 병원에서 뜻밖의 말 한마디에 마음의 치유를 받습니다.
여러분도 뜻밖의 말 한마디에 힐링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 딱히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없지만... 주변에 힐링될 수 있는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또는 우연히 듣게 된다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ㅇ 나 자신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 삶은 꾸준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MBTI 등으로 성향 테스트를 많이 하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있겠지만, 결국 개인이 가진 특색은 다 다르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뤄나가고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나 자신을 잃지 말고, 내 성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사람은 결국 쉽게 바뀌지 않고, 바꾸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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